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랭커스터 왕조 (문단 편집) === 초창기 === 시조는 [[에드워드 3세]]의 3남이자 초대 [[랭커스터]] 공작 [[https://en.wikipedia.org/wiki/John_of_Gaunt|곤트의 존]]. 에드워드 3세의 뒤를 이어 그의 장손자 [[리처드 2세]]가 즉위했지만, 그는 아직 어렸던 터라 섭정을 맡은 곤트의 존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존의 적장자이자 리처드 2세의 사촌형인 [[헨리 4세|볼링브룩의 헨리]]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리처드 2세가 성인이 되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의회와의 불화가 심화되었다. 결국 1386년에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로 원정을 떠나자, 볼링브룩의 헨리는 정계에 입문해 리처드 2세와 적대하기 시작했다. 헨리는 노퍽 공작 토마스 드 모브레이와 함께 청원파의 일원이 되어 리처드 2세의 총신들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이를 리처드 2세에게 강요하다가 그의 격노를 샀고 1398년에 토마스 드 모브레이와의 불화를 구실로 국외로 추방당했다. 이후 [[1399년]]에 곤트의 존이 사망하고 리처드 2세에 의해 랭커스터 공작령을 몰수당하자, 볼링브룩의 헨리는 반란을 일으켜 [[리처드 2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스스로 [[헨리 4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결국 찬탈자였기에 몇몇 귀족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위협했다. 이후로도 헨리 4세는 1400년에 리처드 2세의 지지자들이 꾸민 [[음모]]를 막아내고, 연달아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면서 상당히 고생스럽게 왕위를 유지했다. 헨리 4세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그의 이복동생들이자 곤트의 존의 5, 7, 8남의 가문인 보퍼트 가문, 헨리 4세의 적자이자 후계자인 [[헨리 5세|몬머스의 헨리 왕자]]와의 사이에서 파벌이 형성되었다. 이에 헨리 4세와 헨리 왕자의 사이가 나빠졌으나, 몇 개월 후 헨리 4세가 죽으면서 헨리 왕자가 [[헨리 5세]]로 즉위했다. [[헨리 5세]]가 즉위했을 때는 한창 [[프랑스]]와 [[백년전쟁]]으로 투닥대던 시기라 그는 왕위에 오르고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군]]과 치고받으며 지냈다.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전염병인 [[이질(질병)|이질]]에 걸려서 아들 [[헨리 6세]]가 태어나고 얼마 뒤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